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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at on

by Rybs 2019. 10. 31.

새벽 4시쯤에 그는 끈적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널브러진 몸뚱이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의 몸과 몸이 겹쳐 들러붙는 기분이야 섹스 뒤에 충분히 즐길 만했지만 오늘은 정말 짧게라도 잠을 잘 필요가 있었다. 안 그래도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잠을 잘 수가 없는 수면 습관에 더해 한 해의 이맘때엔 약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었다. 괜한 거부감에 기피하던 것도 며칠이지, 보는 사람 짜증나니까 수면제 처방받고 잠 좀 자란 권고 아닌 권고를 동료에게 들은 것이 얼마 전이었다. 가는 거예요? 침대에 널브러진 둘 중 하나는 어깨 밑으로 떨어지는 긴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겨울의 초입에 접어드는 요즈음엔 해가 느려 여전히 밤에 가까운 새벽의 어둠 속에선 그 머리칼이 무슨 색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까 처음 만났을 땐 무슨 색이었지? 그러나 이미 그가 들이킨 잔은 꽤 여럿이었다. 생각도 없이 가자는 말에 어디인지도 묻지 않고, 겉옷을 챙겨 따라갔다가. 침대에 기어들어가서는 정신없이 붙어먹고, 틈틈이 더 마시고, 살그머니 걸음을 옮기는데도 발에 차이는 바닥의 병들. 그래, 그러니 기억이 제대로 남아있을 턱이 없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마시고, 이렇게 뒹굴었는지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났지만 그럼에도 이유만은 짐작하기 쉬웠다. 관심을 돌릴 수단이 남아 있다는 건 그를 더 짜증 나게, 그러나 조금은 안도하게 만들곤 했으니 곤두선 신경을 다른 자극으로 너덜너덜해질 만큼 혹사시켜야만 죽은 듯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겠지. 매년 얼마간의 기간을 이렇게 보내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약 복용하고 상담 치료받으라고. 어째 자리에도 없는 사람의 말에 귓전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제 물음에 대꾸도 없이 옷을 챙겨 입는 한나를 보며 알만하다는 한숨 뒤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한나는 적어도 그 질문에는 대답했다.

“이름이 뭐예요?”

“한나.”

머리를 틀어 올리며 남자는 한나를 응시하는 듯 보였다. 어둠 속의 얼굴 없는 실루엣이 그를 보고 있었다. 한나, 자고 가도 되는데. 우리 침대는 셋이 잘 수 있을 만큼 넓어요. 다시 들어와요, 네? 뻔한 말들이다. 온기를 나누고 서로의 체온에 기대 여운을 즐기자는 유혹. 새로울 것도 없고, 견디기 힘든 것도 아닌 그렇고 그런 말들. 퀭한 눈 밑을 문지르며 한나는 물끄러미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불청객이라고 느껴서가 아니니 당신 환대와는 상관없이 떠날 생각이었다는 걸 짚으려던 차에 한나는 남자가 확실히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머리칼을 가졌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바로 그 생각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남자는 지금 한나가 문득 떠올린 그 누군가와 전혀 비슷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짐작이긴 하지만, 아마 빛 아래서 봐도. 어둠에 묻혀 흐린 남자는 한눈에도 저보다는 한참 작았다. 왜 미하일 생각을 했지. 혈관에 남은 알코올이 그의 입에서 겨우 꺼낸 말은 맘에도 없는 헛소리였다.

“나중에 또 봐.”

실상 나중에 저 남자를 다시 본다면 적당히 자리를 피할 방법을 그는 내심 생각해두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시야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게 깨질 것 같이 아픈 골인지 제 눈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피곤함과 술에 절어 있었다. 내일 죽어나겠네. 그게 전혀 재미있는 상황이 아닐 걸 알면서도 한나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드디어 좀 잘 수 있을 거란 게 못내 만족스러웠다. 이러지 않으면 잠도 못 자요. 듣고 있어요? 비척이며 소파에 앉아 그는 자신이 뭐라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실상 귀에 들린 건 잔뜩 꼬여 흩어진 음절들이었다. 멍청한 새끼. 약국에서 있는 대로 쓸어온 수면 유도제를 찾아 그는 거실을 얼마간 비척이며 배회하고, 그러고서야 주방으로 향했다. 컵에 물을 따르고 가물가물한 손으로 약 포장을 간신히 뜯고, 그리고. 일순간 그는 주방 베란다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신발이 가볍게 바닥을 디디는 소리. 찬장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유리컵이 달각이는 소리와는 다른 소리였다. 피로에 감겨가던 눈이 한 발 늦게 번쩍 뜨였다. 손이 덜덜 떨리며 찬장 깊은 곳을 더듬다 총을 찾아들었다. 그 한 치 앞도 흐리기만 한 어둠 속에 총을 겨누고,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찰나가 너무도 길었다. 익숙한 소름이 몸을 죽 훑고 내려갈 때 침침한 전등이 제대로 켜지고 나타난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워, 진정해.”

한나는 총구를 황급히 내려야만 했다. 안전장치를 다시 거는 손은 정확했고, 이어 분에 이기지 못해 그립 부분으로 냅다 상대를 가격하는 폼 역시 이와 같았다. 쏠 뻔했잖아요. 일반 총으로 맞춰봤자 상대가 죽지 않을 거란 건 머리로 알았지만 소름이 쭉 돋았다. 예상컨대 자신이 타깃을 빗맞추지 않았을 것을 알았기에 더 그랬다. 그래도 냅다 휘두른 쇳덩이 그새 피하는 걸 보니 미하일은 미하일이구나. 총을 제자리에 쑤셔 박아 넣고서야 한나는 뭐라 더 말을 하려 했으나 미하일의 말이 더 빨랐다.

“술 먹고 약 먹으면 안 좋을 텐데.”

마신지도 좀 됐고 슬슬 두통이 잦아들 만도 한데, 머리는 더 확실하게 아파왔다. 왜 내 집에 있어요? 여긴 왜 온 거에요? 연락하고 왔음 내가 당신한테....도 않았을 텐데. 뭐하고 있던 거예요. 이상하게 당연한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지 어이없다는 시선이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나온 말은 질문이 아닌 대답이었다. 나도 알아요. 현기증과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더 쏘아붙일, 혹은 지금 이 상황이 제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길 여유가 사라지는 느낌에 침묵이 자리를 메웠다. 싱크대를 겨우 짚으며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그의 눈앞에서 바닥에 널브러지지 않는 게 더 급했다. 그것만큼 추한 꼴도 없겠네. 속으로 생각하던 때에 취했어도 그 성질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네. 하는 침묵을 깬 미하일의 말이 들렸을 때 한나는 그 앞에서 제 위장 속에 있는 걸 바닥에 게우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소파까지 부축 좀 해줘요.”


가볍게 그를 부축해드는 팔을 꽉 붙들며 한나 골드는 그날 밤에만 두 번째로 미하일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머리 묶었네요. 그렇지. 평소에도 묶고 다니는데 뭘 새삼스레? 그러게요. 별 의미도 없는 빈 말로 치부하는 제 말들이 정말 의미가 없는지 한나는 고민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묶은 머리를 떠올린 게 아니었단 것 같아요. 앞뒤 설명 없이 말이 튀어나온 것을 제 귀로 듣자마자 그는 후회했다.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지. 술주정뱅이의 헛소리, 약쟁이들의 말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게, 그리고 얼마나 확신 없이 들리는지. 뻗은 손이 머리칼을 묶은 끈에 닿는 와중에 등이 푹신한 소파 쿠션에 닿았다. 끈을 잡아당겨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는데도 저지하는 손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이어 드러누운 제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울 적에도 이상하게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언제나 반사적으로 올라가던 경계가 누그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 생각이 갑자기 났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당연해요. 누군가를 보고 떠올렸단 말이에요. 아까 전에. 당신은 아니었고, 세상에, 그거야 당연하지. 당신이 거기 있었을 리가 없잖아. 나도 내가 어디 있었는지 모르는데. 낯선 사람들이었어. 그 둘 중 한 명을 보는데 묶은 머리를 떠올리지 않았어요. 세상에 한나,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미하일의 말에 조금의 웃음기가 어려 있는 것을 한나는 알 수 있었다. 주방의 불빛은 거실까지 번져오지는 않아 흘러내린 긴 머리 아래 자리한 얼굴이 잘 보이지 않고 흐릴 뿐이었다.

모르겠어요.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여야 말이죠.

뺨을 감싸며 그는 웃었다. 대체 내가 왜 당신을 보고 싶어 했겠어요. 답을 들을 리 없는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손 안의 살갗은 따뜻했으며, 턱과 뺨 일부에 짧게 느껴지는 수염 때문에 조금은 거친 감이 있었다. 한나는 양 손으로 감싼 미하일의 뺨을 가볍게 내리며, 혹은 소파에 닿았던 제 머리를 들며 입을 맞췄다. 진탕 들이킨 위스키와 럼의 향이 숨에 연하게 배어 나오는 건 한순간이었고, 그 찰나만큼 두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젠장. 안되는데. 중얼거리면서도 손은 이미 소파를 꽉 움켜쥐고 있었고, 입술은 다시 맞닿아 벌어진 그 사이로 혀가 얽혀 들고 있었다. 채 감지 않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미하일의 몸을 훑었다. 잘 보이지 않아도 감각이 가져오는 일련의 정보들. 손끝은 그리 부드럽지는 않은 머리칼부터, 그리고 그 사이를 조심스레 쓸어내린 이후에는 옷 아래의 따뜻한 피부, 제 차가운 손이 닿으면 움츠러드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꽉 짜인 근육, 이전의 정사들로 보지 않고도 얼추 짐작 가능할 만큼은 익숙해진 선을 느끼며 시각의 공백을 메운다. 숨이 가빠질 무렵에나 끈덕지게 이어지던 두 번째 키스가 끝났다. 후회할 거야.누가 꺼낸 말인지도 모를 말이 떠돈다. 그러니까, 이 뒤로 이어질, 피할 수 없는, 급하다가도 여유로워지고, 느리다가도 빨라지고, 진이며 맥이며 다 빠질 건 분명하지만 어쨌든 너는 엄청나게 만족스러워 할-그리고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을 섹스 말고 네가 방금 했던 말과, 곧 하게 될 말들을. 피차 기대하는 건 없는데도? 바로 그래서 네가 날 떠올린 거야. 너는 알량한 감상이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위로를 받거나, 격려를 바라는 인간인 적이 없으니까. 간편한 걸 좋아하잖아.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 원하는 것만 취하면 되잖아요. 고개를 상대의 어깨에 묻고 그는 웅얼거렸다. 떠오르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던 게 아니라, 당신이면 골치 아픈 격려나 걱정은 덜 하고 그냥,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어요? 그냥 우리는 표면에 드러난 것과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 모두를 서로 묻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사이일 것 같았거든요. 적당히 멀찍하지만 꽤 친밀한, 모순적이지. 멋대로 굴어서 미안하게 됐다는 사과라도 하지 그래. 나는 사과는 잘 안 하는데요.. 난 네게 기대가 큰데. 알았던 것 같아요. 그 기대가 향하는 방향이 좋았어요. 아마 기대를 한 건 당신이 아니라 나였겠네요. 무슨 소리야. 그냥 넘어가야 하는 소리요. 집중 좀 해요. 일렁이는 눈 안엔 언제나처럼 적당한 거리감이 존재했다. 누가 묻고 누가 답하는지도 모를 대화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에 휩싸여서. 아니, 우린 지금 누워 있는 게 맞지? 둘이 올라 눕기엔 다소 비좁은 소파에서 서로의 손이 벗겨내는 검은 스웨터, 구겨진 와이셔츠, 블랙 진과 회색 정장 바지는 바닥에 깎아내린 껍질처럼 떨어지고, 체중에 바짝 눌린 소파가 삐걱이는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신경이 온통 더듬고, 핥고, 물고 빠는 데에만 집중해 뭐가 뭔지도 모를 그런 상황에서. 한나는 무릎을 세워 앉았다. 기대에 찬 낮은 신음이 제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깨닫지도 못했지만 상대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 위에 가볍게 올리는 것은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제 드러난 상체를 죽 긁어내리는 손, 그 아래 더운 열기가 몰려 불뚝 선, 그것이 어느새 미하일의 입 안에 들어갔을 때 한나는 외려 조용히 제 볼 안쪽을 깨물었다. 겨우 겨우 욱여넣은 듯 뜨뜻미지근한 입 안의 축축한 느낌이 얼마간 아래를 감쌌을 때, 익숙하게 손은 제 양 허벅지 사이에 숙여져 있는 머리에 가 닿았다. 미하일, 더, 더. 평소 같았음 죽어라 피했을 행위에 완전히 전념할 때였다.

바닥에서 핸드폰이 울렸을 때, 한나는 그것을 무시하려고 했다. 누구든 지금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핸드폰은 그러나 그칠 기미도 없이 계속 울렸다. 모르는 사이에 잦아들었던 두통을 다시 데려올 정도로 줄기차게, 켜진 화면이 내뿜는 빛이 너무 강해 눈살이 찌푸려지는 순간.

 


 

그 순간 그는 핸드폰의 진동에 잠에서 깨어났다. 거실 창을 덮은 커튼은 조금 벌어져 그 사이로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젠장, 지금 몇 시지? 버석한 눈이 빛에 적응하느라 고통스레 떨리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엔 숫자 8이 떠 있었다. 광고성 메시지 몇 통과 다음에 또 보잔 의미 없는 연락. 그러나 이것들이 사실상 그를 살린 셈이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다 한나 골드는 그제야 자신이 외투도 벗지 않고 소파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순간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작은 쿵 소리. 뒤따르는 고통. 작게 신음하며 그는 허리에 손을 짚고 바닥을 얼마간 뒹굴어야 했다. 그 스스로에게 욕지기를 몇 번 퍼붓고 나서야 부옇게 눈이 뜨였다. 그는 속으로 욕은 이만하면 되었음 싶었지만 보아하니 그의 아침의 고난은 더 이어지고야 말았다.

"....."

잔뜩 구김이 간 정장 바지 앞섶이 불쑥 튀어나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순간에서야 한나는 간밤에 꾼 꿈을 얼추 기억해냈다. 말도 안 돼. 그래 봤자 별 소용은 없었다. 일어난 일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내용물이 다 빈 채 바닥에 흩어진 약 포장재가 햇빛에 은빛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