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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Is Soft Inside

by Rybs 2020. 3. 30.

 

복잡할 건 없었다. 23은 그의 것이기도 했으니까.


호텔 23의 의사는 여전히 나이트맨이었고 호텔은 언제나처럼 철저한 정기 회원제였으나 여느 윗대가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는 변두리 지부가 그렇듯 23은 호텔의 하나뿐인 의사라는 놈이 그 놈의 룰을 느슨하게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빌어먹을 룰. 나이트맨은 아무도 23에 그냥 들어올 수는 없다며 성질을 빽 쳐댔다만 그 속이 빈 말을 정녕 환자들이 믿기나 하는지 의문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충분히 위협적이지는 않은 제 자신을 미루어보건데 조만간 그는 환자에게 죽고 후임이 올 것 같았다.)그래도 알아서 잘 해나갈 줄 알았지. 나이트맨은 마지막으로 울프심을 본 날을 기억하며 몸서리를 쳤다. 총알이 박힌 건 벽 뿐이 아니었다. 여기서 아기 고양이라도 돌볼 줄 알았어? 고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면 가르릉대며 순순히 목에 리본을 묶게 드러누워줄 것들을 기대했냔 말야. 울프심은 말을 필요 이상으로 고약스레 지껄였고 나이트맨은 탄환이 스쳐 찢어진 팔을 동여매면서도 그를 노려보았다. 제발 좀 닥쳐. 나이트맨은 그렇게 말했다. 그런 걸 바랐겠냐고. 울프심은 그때 나이트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래, 시몬. 당신이 그런 걸 바라고 여기에 온 게 아니지.(이어진 행동, 빳빳한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어 살짝 움켜쥐고 고개를 치켜들게 하는 것도, 쓰다듬이었나? 원하는 게 있음 징징대지 말고 잘 하라고, 의사 선생. 나이트맨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새끼들은 무슨 학교라도 나오나? TV가 문젠가? 사람이 곤궁하면 지 앞에서 배 까고 드러누울 줄 아나? 이런 거 가지고 겁을 먹을 줄 아는건가? 현실은 그냥 한없이 좆같을 뿐이었다. 강제로 게이트를 열고 들어오려던 인간은 철창 앞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고 바닥은 피로 더러웠다. 그에게 머리채를 잡히면서 느낀 건 기묘한 긴장감이나 두려움이 아니고 그 피를 벅벅 닦아낼 미래에 대한 짜증 뿐이었다. 죽이지도 못할 놈이 유세는. '의사 선생'은 그의 상사를 비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여간 나이트맨은 울프심이 그랬다고 바짝 배 깔고 길 사람은 아니었다. 23은 그의 것이기도 했으니까. 깨작깨작 룰을 어기듯 어기지 않고 유연하게 적용하면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말이었다. 호텔 주인의 그 구식 악당스러운 사고방식을 미루어볼때 나이트맨은 막연히 뭐가 잘못되어봤자 저를 죽이진 않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그렇지만 정말 무서운 건 그게 아니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걸 보면 그도 그려놓은 듯한 인물이었다. 망가진 곳이 아무나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브렉시트 합의안이 만장일치로 승인되며 이로써 이달 브렉시트 이행 여부는 영국 의회의 선택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티비 채널을 돌리는 동안 일어났다. 테오 설리반이 시몬 아스톨포의 뺨을 냅다 갈긴 것이다. 나이트맨은 화끈거리는 뺨을 부여잡고도 잠시동안은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얼떨떨하게 상대를 보며 잠시 입을 벌리려던 차에 뇌가 재빨리 상황을 따라잡았다. 지금 저게 내 탓이란 거야? 나이트맨은 소리쳤다. 나는 투표도 안 했는데?(미국으로 온 지가 대략 30년이었다. 이 정도면 그더러 영국인이라고 하는 인간도 없을 시간이다. 악센트에서나 미미하게 드러나던 출신지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나마도 세월에 묻혀 다들 구분도 못 할 정도로 으스러진 출신지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니 이 경우엔 억울한 게 맞겠다.)설리반은 때린 건 그임에도 불구하고 맞은 사람마냥, 그런 것 마냥 그냥 그러고 있었다. 한 쪽에 기대진 목발이 기우뚱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티비는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티비가 문젠가? 객실의 케이블들을 다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그것도 맞은 거라고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마 이게 설리반이 그를 때린 첫 순간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호텔 아닌 호텔도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마냥 농담만은 아닌 듯 2주간 새 손님이라곤 없었기에 나이트맨은 어쩔수 없이 미뤄둔 객실 청소를 했다. 베개 커버도 갈고 침대 시트도 벗겨 빨고 뭐 그런 자잘한 일.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나가고 남은 건 한둘이었는데 그중 한명이, 그러니까 룸 시에라가 문제였다.(문제 삼지만 않으면 문제가 아니다. 아니 진짜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나이트맨은 건조기가 덜덜 돌아가는 위에 걸터앉았다. 회원권 만료일이 언제였지? 건조가 끝난 뒤에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오 나의 클레멘타인...그리고 나이트맨이 후회하는 건 제 자신이 털어놓은 이야기들이었을지도 모르고. 이불에 옅게 남은, 분명 덜 지워진 핏자국은 모른 체하며. 저녁엔 달걀을 삶을것이다. 룸 시에라가 비지 않은 지가 얼마나 지났지? 지금은 비수기였다. 계속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엔. 손가락이 휑했다. 늘상 그랬지만 그냥 그날따라 더 그랬다. 설리반, 이름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아마 그 스코틀랜드산 여우는 그 집에 가 봤을 것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는 곳. 태연한 척 그렇게 말해봤자 반지 두 쌍을 본 순간 무력감이 몰려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망가진 곳이 아무나의 눈에 뻔히 보였다. 쥐고 흔들기가 수월하진 않아도. 하지만 여기엔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의사선생님? 짠, 놀라셨을까나? 나이트맨은 놀랐다. 자신이 아직도 놀랄 수 있단 사실에 놀랐다. 일순간 반지 때문에 사람을 죽일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나이트맨은 문제에 휘말려서는 안 되었다. 다이어 울프심과의 계약서를 작성할 때 그런 항목이 있었던 것 같으니까. 23을 틀어쥐고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닌데. 저녁 메뉴는 뭐에요? 카페트가 깔린 바닥에 목발 다리는 부딪혀봤자 둔탁한 폭, 소리 외에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진 못했다. 폭, 폭. 나이트맨은 건조기에서 내려오자 세상이 좀 흔들려 보여 잠시 멍하니 상대를 쳐다봤다. 달걀 유통기한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아. 설리반이 두개로 나뉘어 보였다가 하나가 되었다. 아무려면 어때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