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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el to Fire

by Rybs 2020. 8. 21.

 

 

 

세상은 그래도 잘만 돌아갔다.


누가 죽든 그런 일쯤은 언제나 일어나기라도 한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창 밖의 그들은 점심 약속을 잡았고, 씁쓸하고 탄내 나는 커피를 내렸으며, 한쪽 방에서는 어설픈 하급 딜러의 화이트 칼라 손님들을 윽박질렀다. 누군가는 잡혀 들어와 뻔뻔하게, 혹은 겁에 질려서 변호사를 요구했고, 꼬질꼬질한 화이트보드에 프린터기가 갓 뱉어낸 따끈따끈한 자료들이 덕지덕지 붙었으며 누구와 누구는 눈이라도 맞았다는 듯 정수기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잡담을 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이미 죽을 기미가 보이는 가엾은 화분에 물을 줬다.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 걸어가는 눈 퀭한 이들의 손목에서 수갑이 짤랑이는 소리와 옅게 남고 섞여 메스꺼운 음식 냄새, 펜이 책상에서 떨어지고, 누군가의 머리를 기어이 철제 탁자에 처박는 쿵 소리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날씨 예보 속 발랄한 새 앵커의 목소리가 들리고-그러니까 언제나처럼 평범한 그런 날들 중 하루에 당연히 세상은 언제나처럼 잘만 돌아가는데 망가지고 제 구실 못하는 것은 그 자신 뿐이던 이상한 그런 날에, 한나 골드는 본래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유니폼 저지를 어깨에 대충 걸치고 멍하니 자신이 앉아 있는 사무실 밖의 그 모든 이상하지 않은 일상적인 것들을 지켜보았다. 그에겐 시체를 인계받기 위해 영안실로 가 신원을 확인하고 서류에 서명하는 등의 일이 아직 남아있었으나 이미 며칠 전에 죽은 사람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한 그의 상관(누군지 알게 뭔지, 그러니까 개를 데려다 앉혀두고 배지를 목에 걸어준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등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에게 뭐라도 말해줘야 하는 의무라도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는 히터도 틀어져 있지 않은 듯 싸늘하고, 어두워 실상 취조실과 다름이 없는 그 사무실에서 그렇게 앉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가 지켜보는 창 밖의 이들 중에는 그가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으며 사무실 창 밖의 그 누구도 그에겐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지하 영안실의 시체 외에 바깥의 아무에게도 관심을 보일 수 없었는데 으레 한나 골드는 이 꿈을 안타깝게도 꽤 자주 꾸었기에 다음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는 했다.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들 중 하나가 영영 사라지는 순간에도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바깥은 믿을 수 없이 소란스러우면서도 너무나 낯섦에도 그 춥고 어두운 사무실 안의 자신만은 평온하기만 하다. 그 시간들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괜찮지 않다는 것을 복기해본다.

이때쯤에는 언제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져있던 사무실로 남자가 들어왔다. 역광을 진 탓에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말이다. 기억하는 데로 흘러간다면 이런저런 얘기들과 더불어 마지막에 붙는 건 권유 같기도 명령 같기도 한, 마치 저 생각해주듯 사려 깊은 말인 척 멋진 껍질을 쓴 공격이다. 다른 부서로 옮기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휴가가 끝나면 복귀하죠. 팀을 꾸린다면 저를 포함해서 꾸리시고요, 동료들과 살갑게 지내라고 명령하신다면 그것도 해 보이죠. 물구나무도 서고 재주도 넘을까요? 코 끝에 공도 좀 올리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것도 녹음 중인가요? 그렇지, 장례식이 언제고, 저는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하면 될까요. 가만히 서서 고인에 대한 온갖 좋은 말들을, 그러니까 저의 핸들러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는 그렇게 보복을 당해 죽으면 안 되었다고요?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타국 누군가의 세례명을 나는 기억하고. 그래, 자네가 그 정보원을 기억하지. 휴가는 일주일 정도면 될 것 같네. 푹 쉬고 돌아오도록 해. 어느 편에 있었든 좋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저야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알아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이 무대 위에서 답을 가진 건 누구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고 상관이라고 설정된 그 인물마저 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깨어나면-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아무렇지 않은 게 세상이다. 한나 골드는 자고 있는 상대를 지켜보는 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만두고 싶어 한 것이 무색하게도 걸어 나가는 대신 한나는 탕비실에 들어설 때 의자에 앉아 자고 있는 그를 보고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아, 어쩌면 그때 다른 부서로 옮기길 바란다면 운운하던 상관의 그 말은 공격이 아니라 걸어 나갈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처럼 눈앞의 무방비하고 얇게 난 저 틈은 말이지, 실상 제가 지켜볼 것이 아니고 빠져나가야 한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큰 소리로 울리는 비상벨이나 인질범의 마지막 요구나 단말마의 비명이나 짧고 큰 총소리 같은 것과 같이 묶일 신호. 그러나 한나는 걸어 나가는 대신 그저 문 앞에 서서는 눈 앞에서 졸고 있는 상대의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를, 내리감은 눈꺼풀과 곧게 다물어진 입술을, 올려 묶었으나 살짝 빠져나온 머리칼 몇 올과 귓바퀴의 점과 잘 개켜진 두 손을 숨 죽여 지켜보았다. 당장이라도 다른 누군가가 침범할 수 있을 이 별 볼 일 없는 공간 속 사실 별 볼 것 없는 상태의 상대를 지켜보는 것을 그만둬야만 하는데. 그러나 다가가지 않은 것은 일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자고 있는 저 뱀파이어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나, 그러나 보이는 모든 걸 안다고 해서 뭔갈 바꿀 위인도 아니지. 짜증 나게도. 무작정 발길질을 하든, 골탕이나 먹어보라고 잡다한 장난에 그를 밀어 넣든, 이러나저러나 미하일 유리예비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웃으며 다가오고 저급한 농담을 입에 올리기도 했으며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만큼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이였다. 그러니 어떻게 그 앞에서 무너져 보이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어줄 위인. 상대가 답하길 원치 않는다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아할 사람. 어떤 상황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어할 그런 사람. 이러나저러나 그의 세상은 아마 잘 돌아갈 것이다. 한나가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그를 대하든, 무너지듯, 혹은 전혀 그렇지 않든 하등 상관없이. 그래서 한나는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치자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은 사람 하나가 죽는다고 망가지지 않는다. 안타깝겠지만 하나가 살아간다고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감정은 인정보다는 부정을 원하는 곳이었다. 한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셈 치며 작은 비밀 하나를 제 스스로에게도 숨길 줄 알았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의.


어떤 대답을 원해? 그야 너무나 뻔해서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 사실 말이죠.

그를 죽인 건 총알이에요. 아뇨, 제 말은 방아쇠를 당긴 사람 뒤의 뒤의 뒤의...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내가 무언가를 망친 것이 맞을 것 같아서.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이 있나요? 없어요. 세상은 이상적인 곳인 적이 없었으니까. 고통은 묻히고 해는 뜨고 그리고 우리 모두 언젠가 죽겠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은 이대로 돌아가겠죠.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모를 대화 속에서 그는 손에 들린 총을 만지작거리며 웃는다. 시체를 가지러 가도 좋습니다. 이 무대는 내일 이어가도록 하고. 욕실 캐비닛에 남은 약이 몇 알인지 생각하며 한나 골드는 또다시 잠에서 깬다. 제 두 손의 손가락은 종종 사람의 것과 다름없이 따뜻하고 무른 살을 긁어내리곤 했다. 붉게 자국이 남을 법도 하지만 상대의 몸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정사는 둘 중 누군가는 지쳐 늘어지도록 계속되다 끝이 나면 느리게 식을 줄 알았고 채 식지 않은 몸을 내보내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으레 한 번씩 같이 자면 안 되냐는 말을 하고도 순순히 나가는 미하일이 설사 어떤 자국이 남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한나는 그걸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늘 방 밖은 방 안만큼 어두웠고 빛은 둘 사이에는 들어차지 못했기 때문이다.

잔뜩 부푼 무언가가 제풀에 터지는 소리를 녹음한 뒤 반복해서 틀어두기라도 한 듯 귓가에서 들리는 이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좋은 사람들이 고무 조각처럼 흩날리고 비명과 연기와 피의 냄새가 코 끝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도 다른 쪽에서는 반짝이는 불빛-또는 눈부신 은빛 꽃가루 아래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브라보, 브라보, 그리고 여기는 시에라, 응답하라. 장난스러운 무전기 속 목소리에 관중들의 짧은 휘파람 따위가 섞인다. 이런. 잠에서 깬 게 맞아, 한나? 당신 총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 나쁜 사람들 쪽을 향했는지 좋은 사람들 쪽으로 향했는지 따위의 것들을 말이야. 한나는 천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제 집 거실 가운데에 앉아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버, 당신의 상처가 전혀 아물지 않는 그런 꿈을 꾸었는데, 당신은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내가 뭘 망쳤나요? 아냐, 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지. 피를 뒤집어쓴 남자의 이름은 입술이 붙지 않고 혀가 붙었다 떨어지며 다듬는 짧은 발음에 불과하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어떤 선을 넘어야 하는 행동인 것 같지 않아요? 비밀은 정말로 이런 사소한 내용이었고 이런 단순한 형태였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 누가 이기고 지는 내용의 것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이기는 건 왜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슬로피 조를 만드는 법은 간단해. 다진 고기에 비슷하게 다진 양파와 시즈닝, 타바스코 소스, 머스터드, 케첩을 넣고 불 위에서 볶은 뒤 빵 사이에 잔뜩 끼워 넣으면 끝이다. 코울슬로를 곁들일 수도 있겠네. 휴일 아침으로 먹기에 알맞으며 시원한 맥주와도 잘 어울리고...그런 게 중요한가? 이 모든 것에 실은 아무 의미도 없을 텐데도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게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기에 의미가 없는 척 그렇게 계속되는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괜찮지 않은 상태를 인지한 채로 언제나처럼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맞춰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에 조금만 더 머물자, 우리. 당신에게 내가 고백을 하나 했다고 치고.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이렇게 반짝이를 뒤집어쓰고 마주 웃는 거야. 한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상대가 웃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를 보는 제 눈이 모든 걸 대답해버릴 게 당연했다. 끝까지 모른 척해줄 것을 알아서 더.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인간도 풍선도 아닌. 빛이 가늘게 들어오던 거실의 소파는 비어 있었다. 빛이 비출 상대는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어.


    Do you want me on your mind or do you want me to go on, I might be yours as sure as I can say.

세상은 언제나처럼 잘 돌아가는데 그는 아니었다. 언제나 아니었다. 마치 그런 척 모든 걸 유예하고 버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