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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less Mind

by Rybs 2020. 10. 22.

우리 내일 바다에 가자. 한나가 말했다. 아마 여기처럼 높은 나무는 없을 테고 잎사귀와 나뭇가지 섞인 검고 비옥한 흙 대신 입자 고운 모래 또는 차가운 진흙이 서로 뒤섞여 우리가 신은 신발 밑창을 물들이고 그나마 마른 모래들은 신발 안쪽에 걸을 때마다 쌓여 발바닥을 간지럽힐 그런 곳에 가자. 해류란 것 따라서 헤엄칠 물고기를 품고 있을 곳,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러리라 믿을 수 있는 곳에. 차고 짠 바람에 연기 냄새가 실려 오거들랑 그것 따라서, 완만한 해안선을 따라 언제까지고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물속에 내가 손을 담그려고 가까이 간다면 당신이 내 팔을 잡고 말릴지도 모르지. 그럼 나는 아마도 그냥 못 이기는 척 한 발짝 물러섰다가, 매번 다른 모습과 높이로 일어나서는 해변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포말을 보려고. 내 눈 색보다 짙고 어두운 물을 지켜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서. 당신도 그렇게 해. 정말 아무 생각도. 하늘이 푸르다든지 점심으로 뭘 먹을지 같은 사소한 생각도 잊고, 내가 당신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려. 걷는 것에 지치거든 모래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곤 없다는 듯 온몸 버석거리는 채로 그저 아무렇게나 앉아도 괜찮을까? 당신 손을 잡고 당신의 꿈속 그 바다와는 같은 곳은 별로 없을 바다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바다에 가자. 나는 정말, 정말로 모든 걸 다 생각해뒀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땅콩버터 병의 뚜껑이 열렸다. 한나는 손가락으로 내용물을 푹 떠서 입 안에 넣었다. 방금 일어난 내가, 그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일요일 오전 8시에 듣기에는 조금 벅찬 감이 있는 대화야. 그리고 땅콩버터는 빵이랑 같이 먹어야지, 빵에는 나이프 써서 바르고. 미하일은 한나의 손에서 병을 뺏어 들었다. 그래서 우리 내일 바다에 가? 예상대로 개의치 않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병의 뚜껑을 잘 닫았다. 그래.


문 앞에 섰던 그 남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사람의 모습이었다. 미하일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형상대로 무형의 존재를 주물렀을 것이다. 그처럼 상대를 안을 두 팔을 남자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의 낮은 목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두 귀와 상대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눈에 담아 기억할 수 있도록 정해진 바 없는 유동적이고 찬란한 모든 색을 가진-또는 그렇기에 되려 아무 색도 가지지 않은 두 눈동자가 들어찰 공간을 깎아 주었을 것이고, 순전히 유희를 위한 혀와 가지런한 진주들을 그 끝 없이 텅 빈 어두운 입 안에 보기 좋게 넣어주었을 것이고... 그런 식으로 한나는 미하일이 가진 것들을 대부분 가져 제 창조주를 오롯이 닮은 존재로 빚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한나가 한나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하얗고 텅 빈 무의 공간에서 그 자신의 창조주를 생각하며 느낀 것은 결국 외로움이야만 하지 않은가? 이상하게도 외로운 사람들은 바다에 간다. 뭐든 가라앉아도 얼어붙어 영영 가라앉을 뿐 썩지 않아 절대 다시 떠오르지 않을 그런 바다에 가면 빈 공간이 메워질 것을 기대하는 그런 심산일지도 모른다. 미하일, 우리 오늘 바다에 가. 한나는 미하일의 둥근 뒤통수를 보며 목 끝으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그 안에 머물게 둔다. 사람들이 기대를 뭐라고 정의하는지 사람이 아닌 그는 아직 모른다.                                                 


You can drive all night, Looking for the answers in the pouring rain. You wanna find peace of mind, Looking for the answer...

여기는 그린 스테이션, 오후 3시 43분을 막 넘어가고 있는 시간에 전해드릴 2부의 첫 곡은....한나는 간이 갈수록 잠이 느는 것 같다며 제풀에 불만스러워 하기는 했으나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과 견주자면, 글쎄. 그리 잠을 많이 자는 편은 아니었다. 잠을 자는 게 어때서? 하고 미하일이 물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들러붙어서는 '자는 것'이 자는 것보다 좋지 않으냐는 말로 은근히 대답은 피하고 화제를 돌리곤 하는 것을 몇 번 겪은 뒤엔 더 캐묻지 않기야 했지만, 그렇게 묻지 않아도 상대의 의중이나 심산은 참 알기가 쉽기도 하였다. 당장 어젯밤에도 기어이 자지 않으려는 듯 뒷목에 코 끝 부비며 들러붙었던 한나였다. 결국 먼저 잠들고 그보다 늦게 일어난 미하일보다 아침에 먼저 식탁에 앉는 것에 성공하고는 바다를 가자는 등의 말을 쏟아내더니, 정작 그렇게 덜 익은 기대를 잔뜩 내비친 그곳으로 가는 내내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그를 두고. 그 모든 걸 상대가 그 밤 동안 몇 번이나 생각해봤을지 미하일은 옆좌석에서 태평하게 자고 있는 새하얗고 차가운 미완의 창조물을 하나 두고 그런 잡다한 것들을 어렴풋이 짐작을 해보았다. 우리는 서두를 필요가 없음을 그에게 말해줘야 한다. 아니, 그런 말은 저 스스로에게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았고, 그러니까 미하일은 실상 한나가 늘상 투덜대는 것처럼("둔하기도 참 둔해, 미하일.") 그리 둔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어서 혀는 딱딱히 굳었고 머릿속은 복잡했다.("생각 많이 하면 머리나 아프다?" 하고 말할 사람이 자고 있는 것도 한몫하였다. 한나의 숨소리는 너무도 작고 느렸다. 그 상태로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고 잠들어 있을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출발했음에도 중간에 재차 기름을 채울 만큼 멀리, 아주 먼 곳으로 운전해가며 미하일 유리예비치는 언뜻 이 모든 게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말도 안 되고 어쩌면 인간 하나가 감당할 수 없이 벅찬 것이 아닐지 자문해보다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유치한 상상이니 흐린 꿈이니 하는 것은 제쳐두고. 정말로 아주 넓은 바다가 눈 앞에 그렇게.("한나, 일어나 봐. 다 왔어.)


가 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할 수 있어? 만난 적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가능한 일이지. 모래가 파이며 발자국이 걸어가는 뒤로 남는 것을 보기 위해 종종 뒤를 돌아보며 한나는 그렇게 물었다. 미하일은 그렇게 대답했다. 만난 적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바람이 세차 머리칼이 나부꼈다. 하얀 포말이 모래를 집어삼키고 뱉는 것을 반복하는 완만한 그 곳은 정말로 차고 짠 내가 났고,  먼 곳에서는 무언가를 태우는 듯 한 연기 내음이 실려왔다. 미하일의 옆에는 말없이 발을 맞춰 걸어가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회색 모래 위의 발자국은 두 쌍이 나란히 찍혀들어가 두 사람이 있음을 증거하였기에 미하일은 한나가 생각해둔 대로 곁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나아가는 것은 관두고 바로 옆의 바다가 예고 없이 크게 밀려들어와 발을 적시기 전에 점점 바다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한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안된다니까. 그러나 말했던 것처럼 못 이기는 척 물러서는 대신 한나는 미하일의 팔을 맞잡은 채 끌어당긴다. 하지만, 미하일. 가슴이 벅차잖아. 아주 조금만 더 가보자는 거지. 파도는 일정하게 오는 것 같다가도 예고 없이 바람에 맞춰 제멋대로 더 깊게 들어올 것을 미하일은 안다. 그럼에도 그는 짧은 망설임 뒤에 한나가 잡은 팔을 빼내는 대신 걸음을 조금 더 안쪽으로 옮겼다. 이상하지, 생각했던 것대로가 아니라면 덜 좋을 줄 알았는데. 한나의 중얼거림은 상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경탄하는 것처럼 들렸다. 기분 좋게 배신당하는 법을 배웠다는 듯이. 그래서 싫어? 미하일의 물음은 한나의 말에 대한 것일수도 있었겠지만("아니, 좋아. 아주 많이.")실상 그것은 자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그래.")서로에게 하는 말이 아닌 듯 하였어도 말이 이어지고 곁에 있는 것이 서로인 시간이었다.

해가 하얗고 푸른 물 위로 떨어질 때까지 둘은 차가운 파도에서 다시 멀어져 해안을 따라 걸어간다. 아무도 혼자 남겨져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