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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Out(上)

by Rybs 2021. 5. 30.

뭐가 더 빠를까, 한나?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운전석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제 배 위에 가지런히 겹쳐 올린 채 뒤로 기대며 시선 끝의 남자가 대답했다. 8번 말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났어요. 당신도 사람이구나 싶던 순간 말입니다. 당신 그날 돈을 꽤나 많이 잃었잖아요. 내가 술을 사겠다고 했었죠, 우리는 바에 갔고요. 바의 티비에서는 복싱 경기가 나오고 있었어요. 당신은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던 거 같네요. 그러한 말들은 실상 여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고 지냈어요. 제가 후회하는 게 무엇인지 아세요? 글쎄. 플라이 져니, 말의 이름이 플라이 져니였어요. 그때 당신을 따라서 거기에 300달러를 건 것을 후회해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는 게. 여자는 낮게 웃었다. 이를테면 웃음보다는 오래전에 말라붙은 무언가를 관 밑바닥에서 느리게 긁어내리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낮아 그에겐 언제나 불유쾌하게 느껴지던 소리를 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그나마 남은 것들을 긁어모아 쥐여주는 식의, 그러나 그녀는 그런 종류의 웃음을 정말 드물게 웃었다는 것을 회상하며 한나 골드는 숨을 느리게 들이마시고, 불안정하게 내뱉었다. 대화가 전혀 이어지질 않잖아, 한나. 너는 지금 하고 싶은 말만 늘어두고 있어. 적적하네요, 라디오 켤까요? 아직 시간이 있다면요...여자의 핀잔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손을 뻗어 채널을 조정하려 들었으나 손은 자꾸 미끄러졌다. 몇 번의 실패를 지켜보던 여자는 결국 피가 끈적하게 굳은 그의 손을 가볍게 쳐내고 직접 라디오를 틀었다....Just a perfect day. You made me forget myself, I thought I was Someone else, someone good... 한나, 사실 여긴 전파도 안 잡히는 것 알지? 예, 본부에 연락을 취하려고 해 봤는데 실패했어요. 추위에 엔진이 나간 모양이에요. 시동이 꺼졌으니 라디오라고 해서 켜질 일은 없는데도, 그럼 지금 들리는 건 뭘까 싶어지지만 그게 중요하던가요? 글쎄, 너는 이 노래를 좋아하잖아.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겠지. 안 그래? 그래요, 비꽈줘서 참 고마워요. 아마 당신은 몰랐을 종류의 것이지만. 맞아, 나는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엔 관심이 없었어. 너를 잘 훈련시켜 내보내는 것 외에 관심을 가진 건 하나도 없었으니 네가 아는 나는 이런 걸 몰라야 하는 게 맞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그녀는 볼썽사납게 깨진 유리창을 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나는 입술 끝에 물린 담배에 직접 그의 손으로 불을 붙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겐 라이터도 없었으며 설사 그에게 라이터가 있었다고 해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을 종래엔 인정해야 했다. 결국 끝이 대부분 뽑혀 단단한 부분이라곤 남지 않은 손을 들어 올리며 그는 우울하게 웃어 보였다.

 

알아요, 이 대화는 죽어가는 사람의 환각이고 당신은 내가 만든 허상이에요. 얼어 죽는 것이 더 빠를지 출혈로 죽는 것이 더 빠를지 정말로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그저 당신을 다시 봐서 기쁜 거고...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될까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죽어간다던지 하는 건 잠깐 잊어버리고. 그가 불을 붙여주지 않았어도 여자의 손 안에는 어느새 불이 붙은 담배가 들려있었다. 우리에게 더 시간이 많았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야. 움직여야지, 한나. 그녀의 입 밖으로 뱉어지는 것이 뜻있는 말보다는 산산이 흩어지는 입김과 연기인 것만 같은 환상 속에서 한나는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상상했다. 하지만 한 번도 시간이 충분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그의 대답은 여느 때처럼 꼬인 부분이 없이 곧게 나왔다. 결국에 그녀는 그의 핸들러였다. 그가 숨는 방식을 가르친 사람 앞에서는 어떤것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를 나눈 적 없으니까. 싫어요, 이제는 정말 손 끝 하나도 못 움직이겠어요. 싫어도 움직여야 해, 한나.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지 않아? 아마도요. 하지만 정말 조금만 자고 싶은데. 떨리는 손이 운전석 밑에 나동그라져있던 총알을 재어 탄창에 채웠다. 지금은 아니야. 방아쇠를 당긴 그 순간 짧은 총성이 허공을 가를 때까지도 그녀가 함께 있었는지 하는 것은 한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슬아슬했어, 한나. 이후에 듣기로는 그랬다고 하니 그걸 믿었을 뿐이다. 그는 설원은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던지 하는 소리도 그와 같이 그저 믿어버렸다.


미하일 유리예비치가 그 일 이후 처음 그를 찾아온 날에 그는 퇴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러진 뼈들이 얼추 붙고, 상처들은 흔적이나 조금 남긴 채 아물고, 그러나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들이 신체와 정신 곳곳에 산재한 어느 날 중 하루였다. 손의 붕대는 언제쯤 풀어? 이대로면 내일이나 모레 중에요. 물 안 닿게 조심하시고... 미하일이 문 너머로 들리는 대화를 뒤로하고 병실 문을 열어 마주한 그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 보였다. 어두운 파란색 눈, 검은 곱슬머리, 완고하고 단단한 낯과 살짝 찡그린 미간, 패이는 세로 주름이 한 쌍. 입가의 옅은 미소.  창백하고 차가운 낯 아래 이리저리 베이고 꺾인 자리들이며 단단한 곳 모두 뽑혀 무르게 빈자리며 바짝 마른 피의 향 등은 사라진? 그에 미하일은 잠시 그간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그러니까-단발의 총성, 눈보라가 그친 뒤 하얗게 점멸하는 시야 너머 덩그러니 놓인 차량과 차가운 눈과 물 냄새 사이의 기름 냄새, 가죽 시트 냄새, 옮기는 순간 다시금 터진 상처에서 흐르던 피, 화약 냄새가 섞인. 흐르다 마른 건지 언 건지 모를 그 피에서 나는 냄새보다 주변을 에워싼 겨울 냄새가 코끝을 메웠을 때 내가 두려웠던가? 거기엔 눈뿐이었고, 자주 더 많은 눈이 내렸고, 희게 반짝이는 눈에 시야가 피로했었고, 시간도 없었고, 흔적도 없었고...아니다, 역시. 그러기에는. 그러기에는 한나의 손 끝을 둘둘 감싸 둔 붕대와 침대 옆에 기대져 있는 목발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눈에 잘만 띄었다. 오랜만이야, 플레이크, 좋아 보인다.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한 그 말이 얼마나 이상하고 어색한지 미하일은 잠시 자신의 목소리로 소리 내어 말한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하였고-아마도 그에 상응하는 날 선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상대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좋다는 말의 정의가 그 사이에 바뀌었어요? 좋기는 뭐가 좋다는 거에요. - 그렇지, 이런 말들. 그 모든 일들에도 여전한 그를 보며 비로소 미하일은 안도했다. 왜 그렇게 안도하게 되었는지도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비행기 안에서 손이 떨렸던 것을 떠올렸다. 차체를 짚었던 쪽 손이 복귀하는 내내 시렸다던지. 당신 손은 흰 눈과 그 감촉이 구분이 가지 않게 차가웠던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왜 이보다 일찍 그를 찾아오지는 못했을까? 바뀌기는, 세간에서 좋다는 말은 언제나처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지. 혹시 나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상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별로 그렇지는 않았는데요. 팔에 목발과 가방을 동시에 들고 대꾸하는 목소리는 늘 그렇듯 태연스러웠다. 그리고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다정한 면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챘다는 것 같은 것은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하자.  집에 갈 거야? 하고 미하일은 물었다. 네.라고 한나는 대답했다.  


 그의 두 번째 방문은 설원에서 돌아온 지도 약 한 달 여가 막 지난 무렵이었다. 그가 다시 '치과'로 돌아가는 날의 전날의 일이다.

 

이제 그만둘 때도 되었잖아, 당신도 나잇값을 할 때가...그 날 아침 온몸에 든 붉은 자국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한나는 이름도 모르는 남의 침대에서 정신을 차렸다. 잠에서 깬 것이 아니고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이 그에게 옅은 모멸감을 주었다. 어젯밤 내내 그의 덜 아문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같은 소리를 하던 사람이 몇이었는지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프고 쑤시는 것이 기분 탓만은 분명 아니었을 뿐이다. 거울 속의 몸 곳곳에 새로 생긴 상처들과 더불어 제 목 전체에 짙게 남의 손자국이 보기 흉한 멍으로 누르스름하게 남은 것이...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혼자 집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타인들의 지루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질문들을 견뎌야 했다. 글쎄, 알게 되면 말해줄게. 손톱이 자라려면 얼마나 걸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낯선 곳을 나서 익숙한 제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장갑을 샀다. 공백의 이질감을 메울 수 있을 만큼 매끈하고 부드러운 고급 가죽 장갑이었다. 그는 꿈이 없는 잠을 원했다.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밤을 바랐다. 하지만 나는 네가 좀 나아질 줄 알았지, 한나. 그때 그 차 안에서의 우리 대화를 생각해보건대...이럴 줄 몰랐어요? 집 앞에서 미하일 유리예비치를 마주치고 그가 뱉은 첫 말이었다. 죽음에 가까웠던 경험이 사람을 바꾸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솔직히 당신이 이럴 거란 걸 예상 못 한건 아냐. 한나가 문을 열어주는 대로 익숙하게 집 안에 들어서며 미하일은 대답했다. 오늘 상담에 오지 않았다고 연락이 와서, 들여다보고 오란 오더를 좀 받았지. 멀쩡해 보이네? 한나가 보기엔 그도 필요할 때는 꽤 효과적으로-그런 식으로 비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한나는 뻔뻔스레 그 말을 받았다. 그러니 그는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모두들 그걸 착각하고는 했지만-멀쩡하니까요. 그는 장갑을 벗어 소파에 던져둔 뒤 전기포트를 켰다. 물이 끓어오르는 사이를 침묵이 가득 채우길 기대했지만 일이 늘 그렇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멀쩡한 사람은 마지막 상담을 빼먹고 목에 멍자국을 단 채 귀가하지 않아. 그의 여상한 목소리와 태도에서도 서늘함을 잡아낼 수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무시하며 한나는 커피 가루를 컵에 덜었다. 정말 별일은 없었어요. 커피에 우유 타 줄까요? 그야말로 뻔한 거짓말이었다. 아냐, 그냥 설탕만 넣어 줘. 미하일은 상대 스스로가 그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고는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커피잔을 순순히 받았다. 이러나저러나 여기까지 온 것, 딱 그 정도가 선을 넘지 않는 일이란 걸 그는 지나치게 잘 알았으며 선을 넘을 생각이 없었다. 빼먹은 거 내일 일과 중에 가야 한단 거 알려주려고 들른 거였어. 상담사 말론 당신이 전화도 꺼뒀다던데. 충전을 까먹었을 뿐이에요. 지금은 켜져 있고요. 당신이 굳이 올 필요는 정말 없었을 텐데. 그런 말을 하며 상대를 보는 눈은 언제나처럼 혼탁하고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푸른빛이었으며 공기 중을 떠도는 커피 냄새 사이에는 독한 술과 온갖 담배 냄새, 눈물과 토사물의 비리고 떫은 내 따위의 것들이 끼어들어 있었다. 그것이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꽤 잘 짚어준다는 점 역시 미하일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수많은 앎 중 하나였다.  

 

신 정말 샤워해야 되겠다. 그게 미하일이 뱉은 말이었다. 한나는 조용히 입도 대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들러준 건 고마워요. 나가는 데에 배웅은 필요 없죠? 예상과 별로 다르지 않은 반응에 미하일 유리예비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럼, 알아서 나갈게. 그의 말대로였다. 굳이 명확히 그어져 있는 선을 넘어야 할 필요는 정말로, 정말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 개입하고, 관조하는지를 정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한나 골드는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최악의 상황에 찾아온 미하일을 마주한 그 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는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