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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ica

by Rybs 2023. 10. 31.

https://youtu.be/UgFSgHBSYqk

가브리엘라에게.


...(어느 가게에서나 팔 법한 평범한 편지지 위에 볼펜으로 적힌 정갈한 글씨. 한 장을 넘어가진 않는다. 반면 편지와 함께 동봉되어있는 서류들은 그보다는 양이 많다. 그렇다고 어디 상자에 쌓아 넣을 정도는 아니고, 그저 서류 봉투 하나가 도톰하게 찰 정도의 양이긴 하다. 편지의 시작은 그렇다. '가브리엘라에게.' 따로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것도 어쩐지 그답다고 가브리엘라는 생각한다.)

...(물론 가브리엘라는 그를 잘 몰랐으며 앞으로도 더 잘 알게 될 일은 없다. 단지 언젠가 요원이 아닌 그 자체를 그녀가 엿볼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특출난 불운이 만들어 낸 균열이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을 들은 건 몇년 전 그가 임시로 옮겼던 부서에서 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다른 동료의 말 정도였다. 그녀는 지나가는 말로 들은 그의 소식에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소속을 옮겼다. 가브리엘라는 그를 잘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로의 삶에서 별 관련도 없는 타인이었다. 새로운 부서는 뱀파이어들과 계약을 하고 현장에 나가는 요원들과 마주칠 일이 더 이상 없는 부서였다. 그 특출난 불운이 아니었다면 그가 무너진 만큼 저도 무너져 둘의 눈높이가 맞는 일 따위도 없었을텐데. 새로 옮긴 부서에서 첫 휴가를 받은 날 그녀는 프라하행 티켓을 2장 샀다. 애인과 함께한 시간들은 즐거웠으며 체코의 낮은 밝고 따스했다.)

...(그는 그녀가 그를 더 알아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소수의 인원으로 진행되었던 어떤 비밀 프로젝트가 사장된 뒤 돌아간 그의 자리에서 그는 또 다른 몇년을 더 보내고 작전 중 사고로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도 몇년이 더 지난 이제서야 공식적인 사망 처리가 되었는지 유류품들이 생전의 유언에 따라 처분되고 있었고 하는 그런 지루한 인간 사회의 법률대로 일이 진행되다 오늘에서야 제 이름이 적혀 있는 편지가 동봉된 서류가 그의 유언대로 그녀에게 도착한 것이리라. "별 내용은 없더라. 그가 예전에 참여했던 작전에 관한 내용인 것 같던데 왜 너에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한나 골드에 대해 아는 것 별로 없는 가브리엘라임에도 왜 그가 그녀에게 이를 남겼는지 그 이유만은 안다. 서류 속 글에 적힌 일련번호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는 사람은 이제 그녀밖에, 아니, ...이제 그 내용을 신경쓰는 사람은 그녀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작성자의 성격이 드러날만큼 깔끔하게 봉인해둔 서류 봉투의 입구가 뜯겨 안쪽이 여기저기 읽혀지고도 그녀에게 결국 넘겨진 것을 보자면. 그리고 그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녀를 믿은 적 없었을 실종된 요원 하나 역시도 그 사실만은 알고 있었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겠지. 더 이상 보안 부서가 아닌 그녀에게는 그에 대한 정보들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다. 만트라라는 이름을 꺼낸 적이 있었다는 것을 간신히 기억해냈지만 찾아가 보기엔 이미 너무 늦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는 몇년 전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으며 그 사실은 어영부영 유보되어 있다가 이제서야 겨우. 그 날 저녁 이른 퇴근 뒤 위스키 한 잔과 함께 소파에 앉아 조명 없이 이르게 지는 해 아래에서 가브리엘라는 그가 그녀 앞으로 남긴 편지와 서류를 읽었다. 가브리엘라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아마도...)


하지만 당신은 결국 묘 앞에 혼자 설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군요? 이제서야 겨우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을까, 그에게도? 적어도 가브리엘라에게 한나 골드란 인물은 정말로 몇년 전에 이미 죽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오랫동안 잘못 보관되어 변질되었을 종이의 노랗게 바랜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위스키 잔을 바라보았다. 서류는 당신 처분에 맡기고 싶군요. 본부에 보낸 사본들은 이미 모두 폐기했겠지만 나는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보관하고 싶다면 보관해도 좋지만 당신이 그렇게까지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길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당신과는 다르게? 죽은 사람에게 혼잣말을 건네며 가브리엘라는 편지를 봉투에 다시 집어넣었다.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