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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road to ruin 본부에 출입하는 인원이었다면 그를 모를 인간, 비인간, 누구든 그를 모를 존재가 있었을까? 미하일이라는 이름보다는 짧은 코드네임 로버, 아니면 그만한 성인 남성에게 붙여지기에 퍽 귀여운 애칭인 '미샤' 정도로 불리던. 곧잘 달고 짠 군것질거리를 들고 다니던 뱀파이어 말이지. 언뜻 느껴지는 벽이랄 것은 없이 마냥 무르고 순해서 대하기에 마음이 편하고, 때로는 좀 만만하고, 그래서 이것 좀 부탁해, 미샤...하고 찾는 일도 있었을, 또 한편으로는 그 남자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눈으로 웃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를 주의깊게 바라보던 몇몇 이들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훌쩍 위로든 옆으로든 누구에게 밀리지 않을성 싶게 큰 덩치며 둥글게 말아 묶어올린 긴 머리칼의 색이 어떤 식으로 햇살 아래에서 색을.. 2021. 12. 31.
Safe daydream 당신은 그 얼음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나는 그 강둑을 떠나지 못했다. 그의 손이 목걸이 뒤쪽을 잡고 당긴다. 얇은 사슬이 끊어지지는 않을 정도로만, 목줄기가 불편하게 조여들 정도로만. 가슴 위쪽에 드리워졌던 팬던트가 목에 딱 붙는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는다면 당연히 피부 위엔 불그죽죽하게 흔적이 남을 것이고, 그것 아니더라도 당장에 그 목줄기 팽팽히 옥죄이는 감각 썩 유쾌하지만은 않는데도...목걸이를 건 남자는 간단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을 빠져나오지 않고 그저 당기는 방향을 향해 몸을 젖힐 뿐이다. 다니엘, 남자는 일부러 교태 어린 신음이며 같잖고 저속한 말들을 뱉기도 했다.(그래, 그렇게, 자기야, 안에 해줘, 거칠게 다뤄줘,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지금 질투하는 거지? 하는 대화가.. 2021. 9. 2.
White Out(上) 뭐가 더 빠를까, 한나?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운전석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제 배 위에 가지런히 겹쳐 올린 채 뒤로 기대며 시선 끝의 남자가 대답했다. 8번 말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났어요. 당신도 사람이구나 싶던 순간 말입니다. 당신 그날 돈을 꽤나 많이 잃었잖아요. 내가 술을 사겠다고 했었죠, 우리는 바에 갔고요. 바의 티비에서는 복싱 경기가 나오고 있었어요. 당신은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던 거 같네요. 그러한 말들은 실상 여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고 지냈어요. 제가 후회하는 게 무엇인지 아세요? 글쎄. 플라이 져니, 말의 이름이 플라이 져니였어요. 그때 당신을 따라서 거기에 300달러를 건 것을 후회해요. 당.. 2021. 5. 30.
Texas Reznikoff 그때 루카 덴트는 그가 12월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루카가 정확히 12월의 어느 날에 태어났는지는 모른다. 그가 아는 건 일단 루카가 우산 없이 빗속에 오래 있었다는 것과, 물에 젖어 조금 축축하고 너절해지긴 하였으나 글씨는 전혀 번지지 않은 명함을 그에게 내밀었다는 것이다. 몇분이 지난 뒤엔 그가 몇 살인지도 알게 되었다. 루카는 그가 올해 25살이 되었다고 말했다. 뉴저지에서 태어났고 대학은 가본 적 없으며 마스코트가 곰이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아는 사람을 통해 바닥재 전문 회사에 방문 세일즈맨으로 취직을 했다고. 바닥재 전문 회사요? 하고 그는 되물었다. 거기에 루카 덴트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거창하게 들리지만 매트리스와 카펫을 판다는 것에 불과해. 본사는 달.. 2021. 4. 16.